크리스찬과 동성애 문제에 대해 살펴보기
3) 반론 : 월터 윙크와 자크 엘룰
세 번째 글을 통해 나는 월터 윙크의 연구에 기대어 나의 입장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사실 <성윤리>에 관해 나는 별로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특히 같잖은 마초의 껍데기를 입고 사는 내가 성적 소수자 문제에 대해 경전이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바가 체험적으로 옳은지 그른지 증명할 길이 없다. 나는 페니스를 가지고 있고, 이성애자이며, 대문을 걷어찬 후 바이크에 몸을 실은 채 남아메리카로 떠날 용기도 없다. 미군에게 난자된 여자의 사진을 보고 슬퍼할 수는 있으나 그 사진을 보기만 해도 배가 아리다는 여자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페미니즘 편을 드는 척 하는 남자는 성형수술을 하는 여자보다 여자를 이해할 수 없고, 동성애자 권리를 말하는 이성애자는 자신의 동성애적 기질을 저주하는 어떤 이보다 지나치게 행복하다. 그러므로 내가 원하는 것은 대단한 비판도 아니고, 아는 척 하는 일도 아니다. 내 꿈은 소박하다. 이 성sex의 문제에 있어서 타인을 타인으로 그냥 내버려두고, 타인을 타인으로 타인되게 하여, 입 닥치고 그를 사랑하라는 성경에 순종하자는 것이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위선이다.
우선, 월터 윙크가 동성애와 성경에 관해 말한 한 에세이는 다음 순서로 논증을 시도하고 있다.
1) 동성애 그 자체보다는 성경을 통해 오늘을 보는 방식이 더 중요하다.
2) 어떤 성경 구절은 사실 동성애 이야기가 아니다.
3) 어떤 구절은 동성애 이야기인지 아닌지 애매하다.
4) 어떤 구절은 동성애 이야기가 맞지만, 가부장주의나 이방 관습을 혐오한 유대주의 맥락에서 어떤 동기로 쓰여졌는지가 더 중요하다.
5) 바울의 성관점이 반드시 옳다고 볼 수 없다.
6) 어떤 구절은 <동성애 행위 그 자체>에 부정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런데 성경에서 정상적이라고 판단하는 것들 중에 우리가 따르지 않는 것도 많이 있으며, 성경에서 부정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중에 이제는 그렇지 않게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있다. 왜 동성애에만 문자적인 잣대를 적용하는가?
7) 그리스도가 율법의 완성이라면? 크리스천들은 자신이 따를 성 규범을 고르고 선택할 권리가 있다.
8) 성경에 성윤리는 없다. 성경적인 성윤리는 없다. 성윤리는 계속 변한다. 사랑만이 성경의 윤리이다.
9) 성경의 성차별 요소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관점에서 성경본문까지도 판단하는 해석적 신학을 개발하자.
나는 고민 끝에 1)~6)에 이르는 반박을 일일이 소개하지 않기로 한다. 왜냐하면 8)의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 글을 읽을 필요조차 없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는 성경이 <윤리책>이라는 데 동의하느냐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갈라진다. 성경에는 북쪽으로 갈지 남쪽으로 갈지 중요한 <윤리적 지침>이 있다고 믿는 모든 사람들은 어버이날에 어버이에 관련된 구절을 찾아서 읽고, 어린이날에 어린이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을 찾아 읽으면서 만족해한다. 그러나 만일 어버이를 대놓고 무시하거나 또는 그것을 함축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을 성경에서 찾기 시작한다면 아마 몇 개의 구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히틀러도 성경 읽었고, 전두환도 기도했다. 성경에 찾으니까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찾으려고 하는가가 더욱 문제인 것이다.
내 생각에 월터 윙크가 가장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 <찾아 읽기>와 관련한다. 현대인이 자기가 필요한 부분만 <찾아> 읽거나 일부러 읽지 않는 것. 왜 성희롱을 일삼는 어떤 목사는 성경에 보면 남자가 창녀를 찾아가는 건 그리 죄가 되는 건 아니었다고 차마 대놓고 <찾아> 읽지는 못하는 걸까? JMS의 일부다처제 같은 시스템보다 현대의 일부일처를 성경이 더욱 옹호하며, 성경은 절대적으로 노예제를 반대한다고 <찾아> 읽기가 그리 녹록잖은 것은 왜인가?
윙크에 의하면, 이런 식으로 성경이 대단히 권위 있는 척 하면서 제멋대로 찾아 읽는 짓은 정말 위선적이다. 성경에 쓸만한 윤리가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성경에서 쓸만한 윤리만을 찾아내는 우리의 이중성이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찾으면서 똑같은 문제에 대해서 상당히 다른 결론을 내리고는 한다. 이 점은 늘 당혹스럽지만, 적어도 아주 오랫동안 매우 많은 이슈에 관하여 똑같은 성경을 가지고 상반된 주장들이 있어왔다. 앞으로도 논쟁은 계속되겠지만, 적어도 기만적이고, 지배구조에 봉사하는 관점에서 성경을 멋대로 찾아읽는지 우리가 매순간 반성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경을 잘못 읽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모든 종류의 <윤리>나 <규범>이란, 시작점이 0이 아니라 힘 있고 지배적인 구조에 기울어진 채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아는 신앙인은 이 문제에 민감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읽는 성경읽기 방식은 좋은 방식일까? 성경읽기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무엇일까?
Waldo Beach가 자크 엘룰에 관하여 쓴 <To Will and To Do>의 서문에서, 월터 윙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바로 엘룰의 <그리스도중심주의>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Ellul is dogmatically Christocentric. `Everything derives from the fact that Jesus is God'" (1964/69:vii; cf.1969:88). The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is strewn with the wreckage of sexual ideologies that have sought to build on other foundations: the "creation orders" of Genesis; cultic cleanliness codes of Leviticus; decontextualized, obscure expressions and portions in the pauline letters, etc. I cannot here offer a full defense of Ellul's christocentric starting point, but only express my conviction that if Christian theology is to maintain any semblance of credibility in sexual matters and make any significant contribution to the debate that rages, Ellul's Christocentric starting point (similar to Karl Barth's) must be maintained in the face of all attempts to reduce Jesus' praxis and teaching to some kind of footnote to Paul (usually misinterpreted), or to exalt the Law over the Gospel. As Paul himself insisted: "For no one can lay any foundation other than the one already laid, which is Jesus Christ (1 Cor. 3:11).
엘룰은 도그마적으로 그리스도중심주의적이다. 모든 것이 예수가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로부터 도출된다. 기독교 사상사에서 성윤리는 서로 다른 기반 위에 그 정당성을 세우며 흩어져 있다. 창세기의 "창조 질서"인가, 레위기의 제의적 정결법인가, 바울 서신 등에서 드러난 문맥을 알 수 없고 모호한 표현과 단편들인가? 나는 여기서 엘룰의 그리스도중심주의라는 시작점을 완벽히 입증할 수는 없고, 다만 기독교 신학이 성 문제에 관해 어떤 신빙성을 갖추어서 오늘날의 논쟁들에 의미있는 기여를 하고자 한다면, 예수의 프락시스praxis를 격하시키려는 모든 시도와 그로써 (대개 잘못 이해되는) 바울에 대한 모종의 주석을 소개하는 것, 즉 복음보다 율법을 숭배하는 일 앞에서 엘룰의 그리스도중심주의적인 출발점을 반드시 견지해야만 한다는 나의 확신을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바울 그 자신이 주장했듯이, "아무도 이미 닦아 놓은 터 곧 예수 그리스도 밖에 또 다른 터를 놓을 수 없다(고린도전서 3:11)."
<그리스도중심주의>란 성경을 문자적 "윤리지침"으로 읽는 관점에서 전환하여,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가 말한 "사랑의 명령" 아래 모든 것을 복속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구약을 포함한 성경 전체를 무정부적으로 공중분해하자는 주관주의가 아니라, 우리의 위선에 대해 정밀하게 점검할 것을 요구하는 객관적 요구이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이런식의 성경 읽기를 상당히 못마땅해하면서 성경을 좀 더 텍스트에 충실하여 꼼꼼히 읽기를(사실은 마음대로 읽기를) 더욱 좋아한다. 마음이 불안할 때 이사야에서에서 "너와 함께 하리라"를 찾아 읽으면서 안도한다. 하지만 사실 이것이야말로 자의적인 성경 읽기라고 생각한다. <성경과 장애인>이라는 책을 읽는 나에게 IVF 선교단체에 있던 한 과선배가 "편향된" 관점으로 성경을 본다고 지적하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실소가 나온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생각하고, 표준이라고 생각하는 성경 읽기의 태도는 사실 얼마나 중립적이고 표준인가? 팔다리가 멀쩡한 그 선배에게는 장애인이 특수하고 편향된? 상황으로 인식되었겠지만, 굉장히 자기중심적인 생각이다.
그러므로, 이제 나의 질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예수의 사랑이라는 명제 외에 우리가 그 어떤 도케티즘docetism으로 빠지는 것을 용납하는 일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기만 아닌가?"
아, 사실 이 질문에 어떤 기독교인의 찬성을 얻어내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특히 월터 윙크는 <Engaging Powers> 같은 책에서 지배구조에 봉사하는 신앙인의 태도에 대해서 주목하는데, 동성애가 성경에서 죄라고 규정하기 때문에 거부하는 많은 신앙인들에게 그것이 지배구조에 합치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하면 펄쩍 뛰며 분노할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천이 오늘날의 성윤리를 주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대어 선택해야 한다는 말은 성경은 내다버리고 맘대로 하라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 노예제에 대한 찬반 논쟁이 벌어졌을 때를 떠올려 보자. 노예제 찬성론자들은 성경을 근거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했지만, 반대론자들은 성경을 근거로 하기가 힘들었다. 설사 말빨로 성경에 노예제 반대 논리가 있다고 찾아 해설해보기는 했을테지만, 문자적으로 표면적으로 더 많고 명확한 노예제 묵인의 근거가 성경에 많았다는 것은 매우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노예에 대한 반대로 나아가기 위해서 그리스도중심주의 이외에 해답은 없었다.
성경이 동성애 행위를 언급하는 모든 곳에서, 성경은 분명히 그것을 죄라고 한다. 나는 그 점을 편하게 인정한다. 문제는 정확히 그 성경의 판단이 정확한가에 있다. 성경은 노예제도 또한 승인했으며, 어느 곳에서도 그것을 정당하지 않다고 공격한 적이 없다. 우리는 오늘날 노예제도가 성경적으로 정당화된다고 주장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백오십 년 전에, 노예제도에 대한 논쟁이 활발했을 때, 성경은 확실히 노예를 보유한 사람들 편에 있었던 것 같다. 폐지론자들은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입장을 성경을 근거로 입증하라는 압력을 받았었다. 그러나 오늘날, 당신이 남부의 크리스천들에게 성경이 노예제를 인정하는지 혹시 질문한다면, 사실 모든 사람이 그렇지 않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기념비적인 전환을 설명해야 하나?
- 월터 윙크, "동성애와 성경" 中.
다시 말해서 성경이 양적으로, 텍스트 표면에서 어떤 현상을 더욱 드러내어 보여주기 때문에 오늘날의 양적으로 우세하고, 정치적으로 주류인 어떤 사상이나 시스템이 합리적이라는 결론에 이르는 것은 위험하다. 성경에 양적으로 "많이" 언급되었기 때문에 정당하다거나,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하면서 오늘날 서점에서 만원 주고 구입한 한 권의 책에 모든 세계 정세의 윤리적 지침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프랑스혁명 이전으로 회귀하는 비극의 길을 다시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는 노예제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하기 힘들다. 성경에서 양적 증거를 많이 찾아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나? 도대체 성경에서 자꾸 "찾아서" 권세와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하려고 시도하면 할수록 문제는 경직되는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한 마디가 사람 목을 치고 말고를 결정하는 시대에나 가능했던 마술적인 사고방식이다. 신앙인은 이 문제에 민감해야 하며, 성경을 짜장면 주문서나 영수증처럼 읽지 말고, 사랑의 조명에 비추어서 주체적으로 읽어야 한다. 이 주체란, 그리스도의 사랑의 지침이다.
또 하나의 예로 신명기 22장 22절에서 간음한 남자와 여자 모두를 돌로 쳐죽이라고 나오는데, 성경은 간음에 대해서 남녀 모두에게 공평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나? 월터 윙크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 요즘은 "간음"하면 지금 결혼한 아내에게 하는 배신행위이지만, 구약의 가부장사회에서는 "간음"이 나쁜 이유는 아내를 배신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남자"의 재산인 여자를 훔쳤기 때문에 나쁜 것이었다. 즉, "남자"가 다른 "남자"에 대해 행한 재산권 침해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고대사회의 이러한 "간음"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간음을 도덕적 관점으로 다시 다루면서, 간음이 대단히 사회를 어지럽히는 행위라고 평가한다. 그런데 동성애에 관해서는 재해석의 여지를 허용하지 않으면서 동성애는 모든 맥락과 상황에서 죄라고 규정한다. 어떤 것은 현대적으로 확대재해석하고, 어떤 것은 문자적으로 적용하는지를 어떤 기준으로 결정하는지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여기까지 말하면, 아마 루이스 스메디스와 같은 사람들은 굉장한 반감을 느낄 것이다. 특히 성경이 성경 안에 자신에 대한 모든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경 외부로 나가서 성경을 독해하고 싶어하지 않는 보수적 성경 읽기 방법을 고수하는 이들에게는 그러하다. 이들에게 월터 윙크의 입장은 대단히 자유주의적인 것으로, "자의적" 또는 "현대적"으로 성경을 해부해버려서 성경의 텍스트는 하나도 남지 않게 하고 앙상한 철학만을 그 자리에 남겨둔다. 이들은 성경이 지침과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명령이 아니라면 무엇이냐고 묻는다. 이들은 성경이 <윤리>가 아니고, 개념만을 담은 <철학서>에 불과하다면 세상에 그런 철학서는 이미 많기 때문에 성경을 볼 필요가 없다고 반박한다. 왜냐하면 철학서에는 인격적인 하나님의 명령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아..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만일 그렇게 진정 생각하는 신앙인이 있다면 그렇게 생각하는대로 살라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어떤 여호와의 증인과, 어떤 퀘이커 교도들, 그리고 어떤 몰몬교도들은 한국의 기독교인들보다 훨씬 성경적이다. 그 사람들은 성경에 쓰인대로 살기 위해서 이라크전쟁터에 가서 아이들을 감싸고, 집총을 거부하며, 커피를 마시지 않고, 문명을 거부하거나, 가정중심적인 삶을 꾸린다. 인격적 아버지가 내리는 절대적 명령에 순종하려는 사람이 있고, 그 마음이 순수하다면 나는 궤변을 늘어놓는 철학적 신학자보다 백배 낫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순수하고 착한 사람들을 좋아하고 존경한다.
또한 월터 윙크와 같은 입장은 성경을 현대적 철학으로 분해하고자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현대적 철학을 성경으로 해부하는 것에 가깝다. 사실 현대의 첨단 철학이 성경 따위에 관심이 있을리 없다. 포스트모던의 주관주의의 극단을 달리는 탈현대에 고대의 세계관이 무슨 신선한 영향을 주겠나? 윙크가 성경을 현대적 비평으로 다시 끌어오는 것은, <옳은 것>이 맥락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역사적인 반성에 기반한다.
"성윤리"라는 개념 자체는 현대 사회의 물질주의와 분열을 반영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점점 성적으로 규정한다. 섹슈얼리티는 삶의 나머지 영역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섹스도 그 사람의 나머지 삶, 당면한 특정 환경,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관련되지 않은 채 그 자체로 "윤리적"일 수는 없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단지 성도덕일 뿐이며, 그것은 변하는 것이고, 때로는 놀랍도록 빠르게 변하여 당혹스러운 딜레마들을 낳는다. 우리는 우리 생에서 혼전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바뀌어서, 결혼 전에 수 년 동안 동거하는 커플들을 보게 되었다. 이에 대한 많은 크리스천들의 반응은 단지 옛날의 위선을 갈망하는 것일 뿐이다.
- 월터 윙크, 위의 에세이.
즉, "옳은 것"이 성경시대에 그 어떤 것이었다고 고찰할 수 있다면 그 "옳은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이어야 하는지 반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은 옛날의 텍스트를 오늘에 적용하는 위선을 범하는가? 위선을 그치고 일관적으로 살던가, 성경적이라고 주장하기를 그치던가.
나는 한 커플을 알고 있다. 그들은 모두 기독교 저자로 이름이 유명하며, 둘 다 동성애 문제에 관해 공공연히 말해왔다. 여자는 게이를 지지하며, 열성적이다. 남자는 동성애자들의 행위에 반대하며, 굽히지 않는다. 내가 아는 바로는, 이 커플은 여전히 함께 있기를 즐기며,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하고, 내가 알기로 같은 침대에서 잔다.- 월터 윙크, 위의 에세이.
우리는 교회에서 우선순위를 엄격히 해야 한다. 우리는 동성애 문제에 관하여 누가 옳은지 아직 합의점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대단히 분명한 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우리 뒤에 자주 앉지만 우리도 잘 알아채지 못하는 동성애자 자매형제 뿐만 아니라, 이 논쟁에 관계된 우리 모두를 사랑해야 한다. 이 문제는 우리가 상냥하게 반대하기로 동의하는 그런 종류의 문제이다. 이 지점에 대한 우리의 차이를 발표하기 위해 전체 지배체제를 산산조각낼 필요는 없다. 내가 언급한 그 커플이 이 분열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계속 안아줄 수 있다면, 당연히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너도 오늘 구원의 손길을 뻗는 한 여인에게 파 한 뿌리를 적선했더구나."
-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中.
도스토예프스키가 위선에 천착했듯이, 우리가 파 한 뿌리의 진실함부터 시작하여 동성애 문제를 다시 다룬다면 지금처럼 오만하게 성경을 근거텍스트로 활용하며 인간을 억압하는 일을 그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러브 액츄얼리>를 보라. 사랑 외에는 아무 것도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 이성애자나, 동성애자나.
덧.
크리스천과 동성애 문제에 대해 잘 정리한 글 하나 소개 : http://voix.tistory.com/54
